Work Text:
"있잖아요, 삼촌."
그러고 보면 한국에 돌아온 것도 참 오랫만이다. 예가 요만했을 때가 엊그제같은데, 이제는 장안대학교 1학년이라고 했다. 제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1학기 성적도 과 수석이었다고 들었고. 밖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세월"은, 그렇게 돌아와 어깨를 짓누른다. 그녀가 가고, 나는 남았다. 그녀는 다시 형과 이 아이를 두고 떠났고, 이 아이도 이제는 어른이 되었다. 자건은 이제는 어른이 된 아이의 반듯한 얼굴에서, 가만히 그녀의 흔적을 찾아 보았다. 그래, 입매가 꼭 닮았구나. 그녀도 그렇게 고운 입매로 미소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고운 모습으로.
그녀가 죽고 십수 년이 지났지만, 형은 재혼하지 않았다. 한두 번, 사소한 스캔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형의 위치가 위치다 보니 찌라시같은 언론에서 떠들어 대었을 뿐, 사실 별다른 관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중달 아저씨의 말씀이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자건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를 닮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 스스로 아버지의 침착함과 용의주도함, 냉철함을 물려받아 아버지의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외롭게 했던 아버지와는 달랐다. 드러내어 사랑을 쏟지는 못했지만, 그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다. 자건도 그것만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포기할 수 있었다. 모두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게임이라면, 차라리 혼자 불행해지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기에.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삼촌, 혹시 우리 어머니..... 기억하세요?"
새끼손가락에 낀 반지를 오른손으로 한번 만져보며, 자건은 고개를 들었다. 꼭 그 나이 때의 형을 닮은, 혹은 꼭 그 나이 때의 자신과도 비슷한, 형의 아들이자 그녀의 아들이고, 그에게는 조카가 되는 그 아이는 호기심이 아닌 아직은 여물지 못한 진지함이 어려있는 눈동자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참 아름다운 분이셨어요.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이 제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지금도, 그때의 어머니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랬지...... 형수님만한 미인도 드물었어."
"하지만 한 번도 웃어주시지 않으셨어요. 지금 남아있는 사진도."
"......네 동생을 낳고 몸이 많이 약해지셨으니까."
"아뇨, 뭐라고 해야 할까요...... 기쁨도 슬픔도 오래 전에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냥 말라버린 꽃 처럼 그런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머니의 보석상자를 열어 본 적이 있어요. 아니, 엄마 생각이 나면, 몰래 그 상자를 열어보곤 했는데."
"그랬니."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조카의 말에, 자건은 쓸쓸하게 미소지었다.
"음악이 슬프고, 그 안에 들어있는 반지들, 목걸이들, 그런 보석이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그 상자 때문에 엉엉 울기도 했어요. 철이 없었죠."
"나도 예전에는 그랬어."
"그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셸부르의 우산 주제곡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에 간 뒤였어요."
"......"
가슴이 콱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자건은 태연한 척 하려 애쓰며 아직은 조금 낯선, 조카의 자를 불렀다.
"원중."
"모르겠어요, 어머니의 보석상자를 하도 들여다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예는, 자건을 바라보며 멋적게 웃었다.
"삼촌, 언제 보석에 대해 좀 가르쳐 주시겠어요?"
"보석?"
"예. 옛날부터 그게 참 좋았어요. 아버지께 기업 일도 배워야 하고, 그렇기는 한데..... 사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보석 다루는 일이었거든요. 예전부터 그래서 삼촌이 참 부러웠어요. 들어오실 때 마다, 뭐라도 좀 여쭤보고 싶고."
자건은 그제서야 뭔가 떠올랐는지, 속으로 예의 생일을 급히 따져보았다. 속도위반 결혼이 아니냐고 주위에서 놀릴 만큼, 결혼식을 올리고 정확히 여덟 달 3주만에 태어난 아이였다. 초산 때는 조금 빨라지는 일도 많다고는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허니문 베이비라고, 축하한다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뿌듯해하던 형의 얼굴과 가만히 낯을 붉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자신도 확신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지만, 자건의 머릿 속에는 그녀의 기억을 지우며 돌아서던 그날, 그녀를 마지막으로 안던 그 밤의 기억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 보석은 뭔가요? 전부터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예의 시선은, 자건이 끼고 있던 반지에 가만히 머물렀다.
"......삼촌이 사랑하던 분의 반지인가요?"
"응?"
"아뇨, 그냥...... 보석을 보고 있으면, 뭔가 그 보석이 말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제가 이상한 소리를 또 하고 있네요. 하하...... 그냥, 모두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만 같아서."
"글쎄, 보석들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거다."
자건은 그 반지를 자세히 볼 수 있게 손가락에서 뽑아 예에게 건네주며 미소지었다.
"그 반지는, 형수님께서 처녀 시절에 끼시던 거다.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첫사랑에게라도 받으신 건지, 그냥 내게 적당히 처분해달라고 하셨는데, 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끼게 되었어. 응,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주 잠시 누군가를 사랑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니. 이 푸른 빛깔이 말이야."
"정말로 그래요. 그리고......"
예는 생긋 웃으며 반지를 돌려주었다.
"정말로 색이 맑고 고와요. 어머니의 상자에서도 이렇게 예쁜 건 본 적이 없는데...... 가까이서 보면 누군가 그 위에 눈물이라도 흘린 것 같은 기분도 들어버려요. 이상하죠? 그 반지를 보면 늘 어머니 생각이 났는데...... 그게 어머니의 반지였다니 말이예요. 삼촌, 그런데 제가 보석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 아버지께는 비밀이예요. 예?"
보석을 바라보는 예의 눈빛은, 처음으로 아버지께 보석 쪽의 공부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그 진지함과도 닮아 있었다. 한쪽이 두려움을 업고 꺼낸 이야기였다면, 지금 이 쪽은 수줍음에 가깝다는 것이 다를까. 아니, 어느 쪽이라고 해도.
그녀가 남기고 간 것은, 그가 평생을 안고 간 그리움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자건은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그 손으로 가만히 조카의 손등을 감싸 잡았다. 해맑게 웃는 예의 미소 속에서, 그녀가 돌아보며 박꽃처럼 하얗게 웃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