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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가랑비가 내렸다. 집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오직 텔레비전 화면만이 거실을 밝고 통통 튀는 색으로 물들이려 애쓰는 중이었다. 화면 속 사람들은 내일이 없는 것처럼 웃었고, 환하게 떠들어댔으며 과장된 제스처로 유쾌함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알로에게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외로운 텔레비전의 오디오가 긴 수도 파이프 배관에 갇힌 것처럼, 연예인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돋보기에 겹친 것같이 밀려왔다가 아무 자취 없이 빠져나갔다. 알로는 왼손에 리모컨을 쥔 채로 단지 채널을 몇 번 넘겼고 이내 손을 내려놓을 뿐이었다. 켜져 있는 텔레비전은 그냥 켜진 대로 제 임무를 다하는 중이었고 알로는 점점 그것을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 쪽으로 흘러갔다. 가랑비에 젖은 유리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포토샵의 블러 효과를 준 것처럼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저 멀리 어딘지 모를 곳에 노란 해바라기 밭이 얼룩처럼 드러나 있었다. 맑은 날 낮에 보았을 땐 선명하고 똑바로 서 있던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채도 낮은 회색 산성비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듯 낯설어 보였다. 알로는 그 황색의 잔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해바라기는 태양이 있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라고 알고 있었는데 어둠과 구름과 빗속에서도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끈질기게 느껴졌다. 생기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죽어버린 것도 아닌 채로 버티는 형태처럼.
문득 칸델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생각을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또렷하게 제 눈앞에 비쳐 보였다. 알로는 스스로가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딱히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무너진 적도 없었다. 주변에선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알로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대답은 반쯤 사실이었다. 겉으로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일상은 그대로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끝나면 잠을 잤다.
하지만 내부의 부식은 전혀 다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겉껍질은 반질거리는 사과처럼 멀쩡한데 속살은 조용히 벌레 없이 벌레 먹어가고 있었다. 썩어 간다는 단어를 스스로에게 적용해 보는 순간 알로는 그것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꽤 많이 느꼈다. 소리 없이 진행되는 붕괴였다.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도 나지 않았고 눈에 띄는 흔적도 없었지만 중심부가 점점 공허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가 죽은 뒤 알로가 처리해야 할 서류도 늘어났고, 작성해야 할 보고서는 배가 되었지만 반대로 정신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텅 빈 자리를 인식하는 감각이 더 예민해졌고, 그 공백이 몸을 서서히 잠식해 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아르세우스님의 눈물이라는 유명한 관용구가 있다. 아르세우스님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가랑비를 내리신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확실한 건 신이 그 죽음을 슬퍼할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슬프다는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가 감정을 주었던 동료가 이젠 더 이상 자리에 없는데도 별다른 감정이 없는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눈물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조용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오래전에 다 말라버린 것일까. 여전히 비가 내리고, 해바라기가 서 있고, 텔레비전에서는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칸델라가 없어도 세계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만이 그녀가 살아있는 세계선에서 제자리에 멈춰 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칸델라에 대한 감정도 또렷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짝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있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색깔을 가진 감정은 아니었다. 내뱉지 못한 말들이 응고되어 덩어리가 된 상태를 이르는 단어에 가까웠다.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어쩌면 영원히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마음이었다. 끝나버린 뒤에서야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로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떠오른 그 모양은 생각보다 훨씬 어두운 색을 띄었고, 예상보다 훨씬 무겁지 않았다. 그저 아래로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물이 일자로 길을 만든다. 유리 위를 흘러내리며 흐릿했던 바깥 풍경을 더 흐릿하게 만든다. 해바라기 밭의 선명함이 비에 씻겨 나가듯 자기 자신 내부의 윤곽도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명하지도 않았다. 살아 있다는 감각과 죽음의 영역이 서로 땅따먹기라도 한 듯이 아주 느슨한 경계로 뒤섞여 있었다. 마치 오늘의 해바라기처럼.
텔레비전에서는 또 다시 한번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알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 웃음은 회색의 산성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해바라기 같았다. 알로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그리고 해바라기 밭을 계속 바라보았다. 가랑비는 아직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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